특별기고 - 김홍기의 패션 인문학 <5>
레트로(Retro), 우리의 미래

발행 2018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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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홍기의 패션 인문학 <5>

 

레트로(Retro), 우리의 미래

 

레트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단절된 세계가 아닌 하나로 이어진 연속의 세계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과거의 친숙한 요소들을 선별 및 해체, 확대, 축소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이뤄내는 것, 이것이 레트로란 어휘에 담긴 인간의 태도다.

 

과거라는 나침반 위에서 패션에서 과거로의 회귀는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2017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자크 뮤와 랑방, 보테가 베네타는 1950년대의 글래머를 재해석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50년대 마릴린 먼로가 쓰던 날씬한 캣츠 아이 프레임 선글라스는 알렉산더 왕의 2018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달구었다. 이보다 앞서 2018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멀버리와 셀린은 1920년대의 초현실주의 느낌이 물씬 나는 액세서리를, 자딕 앤 볼테르는 선명한 빈티지 프린트 드레스를 내놓았다. 2019년 봄/여름 샤넬의 크루즈 컬렉션에 나온 모델들은 1960년대 청년패션의 아이콘 트위기의 시그너처인 하얀색 타이즈를 신고 등장했다.


디자이너는 현재에 대한 반성과 다가올 미래의 낯섦이 주는 대한 불안감, 아이디어의 고갈 앞에서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따뜻한 감성과 새로운 창조성을 발견한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저명한 TV 쇼 호스트였던 아이작 미즈라히는 “과거의 옷을 먹이감으로 삼는 게 패션의 본질이냐?” 라는 한 비평가의 질문에 “제가 닭고기 요리라면 사족을 못써요. 수 세기에 걸쳐 클래식한 닭고기 조리법은 존재해왔죠. 조리법의 양념 일부를 바꾼다 해도 기본은 여전히 닭고기에 있잖아요. 패션도 다르지 않죠. 클래식의 지위를 얻은 옷은 새로운 직물과 액세서리로 새롭게 해석해야 할 가치가 있는 거죠. 현대적인 취향에 맞추기 위해 양념의 일부를 바꾸는 거에요” 라고 답했다. 꽤 멋진 해명이지만 아쉽게도 아이작 미즈라히의 말에는 한가지가 빠져있다. 패션은 단순하게 과거 스타일의 요소를 베낀다기 보다, 과거의 삶에서 삶의 비전을, 정서적 풍경을 추출해낸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는 과거에 대한 뿌리 깊은 그리움이 아닐까.


18세기의 철학자 볼테르는 “역사는 변화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를 통해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들이 바뀔 뿐이다”라고 말했다. 패션은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고,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요소를 차용해서 새로움을 창조한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경향이 강해졌다. 과거의 원본을 살짝 비틀어 현대적 스타일링과 뒤섞어 제3의 작품을 만든다.


 패션이 과거의 그리움을 소환할 때 빈티지(Vintage)를 사용한다. 빈티지는 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를 수확한 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와인의 품질과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다. 빈티지는 점차 의미가 확장되어 패션에서는 오랜 기간이 지나도 독자적인 멋을 상실하지 않는 특정 시대의 옷의 스타일을 의미하게 되었다.


빈티지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80년대 말이다. 80년대는 경제호황이 지속되면서 디자이너 상표가 창궐하고 패션에서 개인의 스타일링이 중요해졌다. 80년대의 팽배한 물질적 풍요와 달리, 정신적 공허함을 느낀 당시 소비자들은 소외감을 표현하기 위해 오래된 듯한 형태와 색상의 의류와 오브제를 선호했고, 이를 통한 청빈함을 자신 있게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 빈티지는 오늘날 예술, 패션, 인테리어, 소비방식 등 생활양식 전체를 관통하는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레트로란 빈티지 의류에서 영감을 받은 룩을 말한다. 회고한다는 뜻의 ‘Retrospective’에서 왔다. 70년대 프랑스의 저널리스트들이 이전 시대를 반성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쓰면서 전 세계로 퍼졌다. 레트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단절된 세계가 아닌 하나로 이어진 연속의 세계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과거의 친숙한 요소들을 선별 및 해체, 확대, 축소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이뤄내는 것, 이것이 레트로란 어휘에 담긴 인간의 태도다.


레트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과 스타일을 완성하는 소재의 관점에서 볼 때 빈티지와 다르다. 레트로 패션은 과거를 차용하되 최신의 최근 캐주얼과 포멀웨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서로 다른 실루엣과 색상, 품목끼리 자유롭게 레이어드 룩을 연출하는 것이 스타일링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빈티지 패션에 현대적 디자인 감각을 가미하거나 빈티지 의류의 색감을 조합하는 것은, 시간을 통해 검증된 색과 실루엣을 조합하는 일이다. 레트로는 우리 앞으로 난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과거로부터 배운 지혜와 검증된 아름다움’ 임을 말해준다. 인간은 내 앞에 펼쳐졌던, 그러나 지금은 되찾을 수 없는 과거와 화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레트로(Retro)는 성찰적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의 태도일 것이다. 레트로는 우리의 미래다.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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