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찌라의 ‘기업 읽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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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타고니아, 노스페이스 |
더글라스 톰킨스가 이본 쉬나드와 파타고니아로 6개월간 여행을 떠난 동안, 아내인 수지 러셀은 두 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때 아내도 친구와 의류 사업을 시작하니, 바로 ‘에스프리’다. 1980년대에는 생소했던 자연주의를 주창하며 재생지·콩기름 인쇄 기술을 도입했고, 과감한 컬러와 로고플레이로 사랑받았다. 에스프리는 2000년대 후반 53개국에 진출, 연 매출 35억 유로(약 5조 2,000억 원)에 달할 만큼 성장한다.
하지만 사업에 한창 몰입한 러셀과는 달리 톰킨스는 점점 불안에 시달렸다. 자연을 동경하면서 살아온 자신이 제품을 만들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커졌고 1989년 이혼한다. 톰킨스는 에스프리와 노스페이스의 지분을 처분하고 백만장자가 되어 남미의 파타고니아로 떠난다. 여생을 파타고니아의 자연을 지키는데 바치기로 한 것이다. 이때 재단을 만들고 활동하면서 인생의 두 번째 사랑, 크리스틴 맥디빗을 만나게 된다. 맥디빗은 파타고니아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자, 후에 파타고니아 CEO까지 오른 인물이다.
두 사람은 파타고니아 산맥이 걸쳐 있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다니며 땅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들이 사들인 면적은 200만 에이커, 서울의 13배가 넘는다. 당시 남미에서는 농장과 공장 개발로 인해 천혜의 자연환경이 급속히 훼손되고 있었다. 이에 톰킨스 부부는 빽빽한 숲과 풍부한 수자원, 비옥한 토질을 지닌 원시림을 매입해 국립공원 조성에 나섰다.
2015년, 톰킨스는 새 공원을 만들기 위해 카약을 타고 나섰다가 강풍을 만난다. 카약은 뒤집어졌고, 톰킨스는 구조됐지만 저체온증으로 끝내 숨졌다. 향년 72세였다. 톰킨스가 죽기 한 달 전 응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푸말린파크를 가꾸고 있었다. 도로, 안내소, 식당, 공원을 만든 뒤 칠레 정부에 열쇠를 넘길 참이었다. 두 딸과 손자들에게는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고, 전 재산을 칠레와 아르헨티나 환경을 위해 기부할 생각이라고 한 말이 유언이 됐다. 톰킨스가 죽은 뒤, 아내 맥디빗이 그의 뜻을 이어 칠레 정부에 땅을 기부한다. 칠레 전체 국립공원의 40%에 달하는 새로운 국립공원이었다.
한편, 톰킨스가 떠난 노스페이스의 운명은 다사다난했다. 노스페이스는 수요와 관계없이 장비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갔다. 고급 기능을 갖춘 스키복, 마운틴 재킷,서밋 시리즈 같은 고기능 제품군을 출시하고, 한계에 도전하는 전문 산악인들을 후원했다. 지금은 고등학생들이 많이 찾는 눕시 재킷도, 1992년에는 고성능 다운 충전재와 혁신적 구조의 전문 장비였다. 그러나 고기능성 장비에 집중한 전략은 소비자 외면, 재고 누적, 자본 부족으로 이어졌다. 남은 재고는 아웃렛에서 할인 판매되었고, 이로 인해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하며 재무 상황도 악화됐다.
1988년, 노스페이스는 30여 개 아웃도어 브랜드를 보유한 오디세이 홀딩스에 인수되지만, 오디세이마저 파산하면서 노스페이스는 공매 처분 대상이 된다.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격동기를 겪는다. 1997년에는 세 개 회사가 공동 경영에 나섰으나, 역대급 회계 부정 스캔들이 터진다. 매출과 이익을 실제보다 두세 배 부풀려 보고하다가 발각된 것. 이 사건으로 주가는 폭락했고, 노스페이스는 또다시 파산의 수렁에 빠진다.
2000년, 노스페이스는 마침내 잔스포츠, 이스트팩, 키플링 등을 보유한 패션 그룹 VF코퍼레이션에 인수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재무적으로는 여러 잡음이 있었지만, "Never Stop Exploring"이라는 슬로건처럼 아웃도어 제품에 대한 탐험과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일관된 브랜드 정신은 노스페이스를 점차 힙한 브랜드로 만들었고, 결국 오늘날 스트릿 패션의 아이콘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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