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찌라] 레고가 디지털 시대 성인 팬들을 사로잡은 방법 (하)

발행 2026년 03월 12일

어패럴뉴스 , appnews@apparelnews.co.kr

이찌라의 '기업 읽어드립니다'

 

레고 스타워즈 시리즈

 

아이들이 갖고 싶은 장난감 1순위였던 레고가 처음 위기를 맞은 것은 1990년대. 특허가 풀리며 저가 유사품이 쏟아지는 사이, 슈퍼마리오와 포켓몬이 아이들의 방을 점령했다. 아이들은 브릭을 끼우는 대신 컨트롤러를 쥐었다. 레고는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 의류, 시계, TV 채널까지 사업을 닥치는 대로 확장했지만 그럴수록 인기는 차게 식었다. 브랜드의 핵심이 흐려졌고, 1998년 창사 이래 처음 적자를 냈다.

 

2004년, 맥킨지 출신의 33세 컨설턴트 예르겐 크뇨르가르드가 등장하여 'Back to the Brick'을 선언했다. 브릭 종류를 1만 3000개에서 6,500개로 줄이고, 의류, 시계 사업을 포기했으며 레고랜드의 운영권을 매각했다. 예르겐은 대신 신의 한 수를 둔다. 스타워즈, 해리포터, 인디애나 존스 같은 할리우드 IP와 전략적 제휴를 맺은 것이다. 레고 스타워즈 시리즈는 출시 즉시 폭발적 반응을 얻었고, 영화까지 이어지며 브랜드를 완전히 새롭게 포지셔닝했다. 그 결과, 예르겐 취임 이후 2년 만에, 8억 달러 적자에서 2006년 흑자로 돌아서는 반전이 일어났다.

 

그런데 2017년, 두 번째 파고가 찾아왔다. 스마트폰 게임이 아이들의 시선을 다시 화면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레고의 성장이 멈춘 것이다. 레고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다. 전체 직원의 약 8%인 1,400명이 회사를 떠났다. 이때 이사회가 새 CEO를 찾으며 내건 기준이 눈길을 끌었다. "어릴 때부터 레고를 가지고 논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선택된 닐스 크리스티안센은 취임 후 본인의 레고 애장품인 레고 포르쉐 911을 공개하며 덕후를 자처했다.

 

닐스가 택한 전략은 디지털 위기에 맞서 오프라인을 강화하는 역발상. 2019년 570개였던 레고 공식 매장을 2023년 900개 이상으로 늘렸다. 2021년 뉴욕 5번가 플래그십 매장을 시작으로 '리테일테인먼트', 즉 쇼핑과 체험을 결합한 공간 개념을 도입했다. 우선 아이들이 브릭을 직접 만져보고 완성품을 전시할 수 있는 자유 놀이 공간을 만들었다. 고객이 자신만의 미니 피규어를 디자인하고 즉석에서 인쇄해 조립하는 퍼스널라이제이션 스튜디오도 도입했다. 디지털 시대에 굳이 아날로그 공간을 늘린 이유는 하나였다. 레고의 본질은 화면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조립하는 감각적 경험에 있다는 믿음이었다.

 

변화의 또 다른 축은 성인 팬덤을 정면으로 끌어안은 것이었다. 전 세계 레고 성인 팬은 AFOL(Adult Fans of LEGO)이라 불리며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이 레고 연간 매출의 20%를 소비한다. 2011년 레고는 누구든 자신의 레고 세트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1만 표를 얻으면 실제 제품으로 출시하는 '레고 아이디어스' 플랫폼을 열었다. NASA 아폴로 로켓, 여성 과학자 세트 같은 제품들이 모두 팬들의 제안에서 탄생했다. 2021년에는 브릭으로 꽃다발과 식물을 만드는 레고 보태니컬스 시리즈를 선보이며 기존 레고와 거리가 멀었던 10~20대 여성 고객을 새롭게 유입했다. 레고의 견고한 팬층을 넘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가볍고 실용적인 아이템이었다.

 

IP 협업의 범위도 성인 문화 전반으로 확장됐다. 2024년에는 F1과 파트너십을 맺고 레드불, 페라리, 맥라렌, 메르세데스 등 10개 팀 전체를 세트로 출시해 레이싱 팬들을 공략했다. 세계 최대의 배틀 로열 게임 포트나이트와 협업해 게임 안에 레고 세계를 구현했는데, 출시 하루 만에 동시 접속자 2,400만 명을 기록하며 누적 플레이어 8,700만 명을 달성했다. 나이키와는 에어조던 1, 에어맥스 등 운동화를 브릭으로 재현한 콜라보 제품을 출시하며 스니커 수집가들의 수집 욕구를 자극했다. 스포츠, 게임, 패션이라는 성인 문화 전체를 레고의 세계관 안으로 끌어들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레고는 프리미엄 완구를 넘어 성인 취미 시장의 핵심 브랜드로 자리 잡았으며, 백화점과 복합 쇼핑몰 내 매장을 꾸준히 늘리며 팬덤을 키우고 있다.

 

2024년 기준 레고의 연간 매출은 740억 크로네, 약 10조 원 안팎으로 전 세계 완구 업계 1위를 지키고 있다. 1932년 나무 오리를 깎던 목수의 후예가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도 아날로그의 손맛으로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이제 레고 앞에 놓인 질문은 이것이다. 브릭을 끼우는 손의 감각이 AI와 가상현실이 일상이 될 다음 세대에게도 여전히 설렘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 100년 기업을 향해 나아가는 레고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야 할 브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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