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근의 '디지로그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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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챗GPT |
얼마 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를 관람했다. 영화 도중 잡지사를 사들이려는 부유한 경영인에게 편집장 미란다가 회사의 경영 방향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최근 가장 뜨거운 키워드인 AI를 활용해 인력을 구조조정하고, 회사를 수익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필자에게 큰 공감을 남긴 미란다의 한 마디는 이랬다. "그래도 패션의 아름다움, 예술성, 인간이 만들어낸 성취, 패션의 세계를 걷는 여정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그 말은 영화 속 대사로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패션 산업 전체를 향한 질문이자 외침처럼 들렸다. AI가 이미지를 만들고, 문장을 쓰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상품을 추천하는 시대에 우리는 패션의 무엇을 AI에게 맡길 수 있고, 무엇은 끝까지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줄일 수 있는 것과, 줄이면 업의 본질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디지털과 AI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패션 비즈니스의 아날로그 영역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디지털이 빨라질수록 아날로그의 깊이는 더 중요해진다. AI가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들수록, 무엇이 좋은 이미지인지 판단하는 안목은 더 필요해진다.
패션은 본질적으로 몸의 산업이다. 어깨선, 암홀, 기장, 촉감, 무게감, 안감의 미끄러짐, 봉제선의 거슬림, 신었을 때의 압박, 움직일 때의 여유는 여전히 물리적이다. 화면에서는 멋져 보이지만 입으면 불편한 옷이 있고, 데이터상으로는 반응이 좋아 보여도 매장에서 손이 가지 않는 상품이 있다. 이것이 패션이 끝까지 피지컬 비즈니스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패션기업의 디지털 전환도 이 지점에서 자주 흔들린다. 시스템을 도입하면 일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AI를 붙이면 생산성이 올라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데이터를 모으면 고객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자주 확인되는 현실은 다르다. 무엇을 왜 바꾸려는지, 누가 어떻게 쓸 것인지, 어떤 업무 프로세스 안에 녹여낼 것인지가 정리되지 않으면 기술은 금세 장식품이 된다.
최근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보고 만나는, 빠르게 성장한 패션 스몰 브랜드들을 보면 또 다른 고민이 보인다. 온라인 플랫폼과 SNS 마케팅의 힘으로 몇십억, 몇백억 규모까지 성장한 브랜드들이 많아졌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감각과 속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나타난다. 상품기획 체계, 원가 구조, 생산 관리, 재고 운영, 현금흐름, 시즌별 물량 의사결정, 조직 역할 분담이 필요해진다.
여기서 디지로그의 관점이 필요하다. 디지로그는 디지털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아날로그로 돌아가자는 향수도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을 제대로 쓰기 위해 아날로그의 본질을 더 명확히 하자는 태도에 가깝다. 반복 가능한 일은 디지털로 빠르게 처리하고, 사람이 축적한 감각이 필요한 일은 더 정교하게 보호해야 한다. 데이터는 판단을 돕는 나침반이 되어야지, 브랜드의 취향을 대신하는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AI는 유능한 조수가 될 수 있지만, 고객과 상품과 브랜드의 맥락을 책임지는 최종 편집자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영화 속 부유한 경영인들이 놓친 것도 이 지점이다. 그들은 런웨이를 낡은 매거진 회사로 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런웨이가 가진 진짜 자산은 지면이 아니라 편집의 감각이었다. 사무실이 아니라 사람들의 안목이었다. 과거의 권위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축적된 패션 언어의 질서였다. 이것은 재무제표에서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라지고 나면 가장 먼저 빈자리가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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