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근] AI시대, K패션의 마지막 9부 능선 (하)

발행 2026년 08월 23일

어패럴뉴스 , appnews@apparelnews.co.kr

최석근의 '디지로그 2.0'

 

AI 생성 이미지

 

그동안 많은 브랜드가 어떤 콘텐츠를 만들고, 누구와 협업하며, 어떤 플랫폼에 입점하고, 어떻게 화제가 될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다. 그러나 세계관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마케팅은 브랜드를 알릴 수는 있어도 브랜드를 남기지는 못한다.

 

바이럴은 고객을 유입시키지만 그 자체로 가격의 정당성과 재구매의 이유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트렌디한 캠페인과 인플루언서 협업도 일시적인 관심은 만들 수 있지만 브랜드가 돌아갈 중심점이 될 수는 없다.

 

세계관은 마케팅과 브랜딩을 시작하기 전에 존재해야 하는 '기반'이다. 마케팅이 브랜드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고, 브랜딩이 인식과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라면, 세계관은 무엇을 어떤 태도로 알리고 어떻게,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세계관이 분명한 브랜드는 유행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게 필요한 유행과 그렇지 않은 유행을 구분한다. AI, 데이터, 앱, 팝업, 협업과 같은 새로운 수단도 남들이 한다고 도입하지 않는다. 그 기술과 활동이 브랜드 코어를 강화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패션 퍼스트(Fashion First)'가 필요하다. 기술을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다. 기술이 브랜드 앞에 서서 메시지를 결정하게 하지 말고, 브랜드의 철학과 세계관이 기술의 역할을 결정짓게 하자는 것이다.

 

AI와 디지털 산업이 가장 큰 화두인 시대지만 패션 브랜드 비즈니스의 중요한 절반은 여전히 아날로그다. 패션을 이루는 것은 몸에 닿는 소재의 촉감, 입었을 때, 그리고 움직일 때 달라지는 실루엣이다. 예상하지 못한 색의 조화이고 디자이너의 손길이 남긴 미세한 흔적이다. 매장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공기의 온도와 향, 음악, 직원의 표정과 말투이기도 하다.

 

데이터는 고객이 무엇을 클릭하고 구매했는지 알려줄 수 있지만 고객이 왜 그 옷을 입고 자신감을 얻었는지까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AI는 최적의 디자인 조합을 제안할 수 있지만, 어딘가 불완전한 한 부분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끝을 계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패션에는 '디지로그 세계관'이 필요하다. 여기서 디지로그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절반씩 섞는 절충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단순히 연결하는 옴니채널이나 매장에 QR코드, 디지털 스크린을 설치하는 피지컬 경험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이다.

 

디지로그 세계관은 인간의 감각과 감정, 관계와 시간을 중심에 두고 디지털의 데이터와 연결성, 확장성과 개인화 능력을 활용하는 운영 철학이다. 디지털은 고객의 불편을 줄이고 브랜드의 세계를 더 정확하고 넓게 연결한다. 아날로그는 그 세계에 인간적인 의미와 감각, 기억할 이유를 부여한다.

 

한국 패션의 기술과 완성도는 이미 충분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 시즌의 작품을 넘어 앞으로 계속 탐구하고 축적해 가야 할 자신들의 질문이다.

 

'이번 시즌에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나는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어떤 AI를 도입할 것인지, 어떤 플랫폼에 진출할 것인지, 어떤 콘텐츠를 빠르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고객이 우리 브랜드를 통해 반드시 느껴야 할 감정은 무엇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디자인과 제작의 원칙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제품과 공간, 서비스와 콘텐츠를 통해 일관되게 증명될 때 브랜드는 비로소 세계관을 갖는다. 그리고 그 세계관이 고객의 경험과 참여를 통해 살아 움직일 때 하나의 디자인은 비즈니스가 되고 브랜드는 문화가 된다.

 

AI 시대에는 '잘 만든' 브랜드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고객이 기억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브랜드는 여전히 많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가가 아닌, 얼마나 자기다운 세계를 만들고, 지키고, 확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K패션이 글로벌 브랜드들과 경쟁하며 넘어야 할 마지막 9부 능선. 그것은 기술도, 디자인도, 마케팅도 아닌 '세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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